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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 603∼661) : 신라 제29대 왕


즉위 전 성명은 김춘추(金春秋)이고, 진지왕의 손자로 이찬(伊飡) 용춘(龍春)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으로 진평왕의 딸이다. 비는 문명부인(文明夫人)으로, 각간(角干) 서현(舒玄)의 딸이자, 김유신의 누이동생인 문희(文姬)이다. 그의 용모는 백옥과 같고 영특하고 늠름하여 온화한 말씨로 말을 잘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세상을 다스릴 큰 뜻이 있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김춘추의 아버지를 용춘 또는 용수라고 하여 둘을 같은 이로 말하는데 반해, 『화랑세기』에는 용수와 용춘의 관계를 형제로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진평왕 44년(622년)에 이찬 용수를 내성사신으로 임명했다는 기록과, 진평왕 51년(629년) 파진찬 용춘이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한 기록이 있다. 동일인일 경우에 7년 이후에 관등이 2위 이찬에서 4위 파진찬으로 낮아졌다는 사실이 된다. 따라서 둘의 관계를 형제로 보는 견해가 더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그는 김유신이 풍월주로 있을 때에 이미 부제에 올랐다. 하지만 보종과 염장이 있어 양보하며 기다리다가, 24세에 비로소 제18세 풍월주에 오르게 되었다. 원래 보종의 딸인 보량과 결혼하여, 고타소를 낳았는데, 부인을 무척 사랑하였다. 이후 김유신의 동생인 문희와 관계를 가지게 되었는데, 보량이 아이를 낳다가 죽은 후에 문희가 정비가 되었다. 


642년에 신라의 서쪽 거점인 대야성(大耶城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이 백제에게 함락되고, 사위인 품석과 딸 고타소가 죽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김춘추는 당과의 외교관계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같은 해에 청병을 위해 우선 고구려 보장왕에게 사신으로 갔으나, 보장왕이 죽령 이북의 땅을 요구하여 무산되면서 고구려에 억류당하였다. 이에 김유신이 1만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고구려 남쪽 경계에 들어가니 비로소 풀려났다. 대야성에서의 패배와 고구려에 대한 외교의 실패 등은 김춘추와 김유신의 정치적 결합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것이 추후 통일신라를 여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647년에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 귀족들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과 대치한 지 8일 만에 선덕여왕이 죽고, 흉조라 일컬어지는 유성이 월성 쪽으로 떨어지는 등 불길한 일이 생겼지만, 김춘추와 김유신의 계략으로 이를 진압했다. 


진덕여왕은 즉위 후, 알천(閼川)을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비담의 반란 진압과 진덕여왕의 옹립 과정은 김춘추와 김유신에게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와의 동맹관계 수립과 백제공격을 위한 청병에 실패하자, 다시 청병을 목적으로 648년에 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당 태종으로부터 백제 공격을 위한 군사 지원을 약속받았다. 다만 이후 당나라의 요구에 따라 신라는 중고시대 전 기간을 통해 계속 사용해오던 자주적인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 연호인 영휘(永徽)를 신라의 연호로 채택하는 등 당의 조공국으로 국제질서에 편입된다. 


귀국 후에는 체계적으로 정비된 수와 당의 제도를 본받아 일련의 내정개혁을 시행하였다. 구체적으로 649년 중조의관제(中朝衣冠制) 채택, 651년 왕에 대한 정조하례제(正朝賀禮制) 실시, 품주(稟主)의 집사부(執事部)로의 개편한 것 등이다. 


진덕여왕이 재위 8년만에 죽었는데,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차기 왕의 옹립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처음에는 왕위계승자로서 상대등 알천이 천거되었다. 그러나 알천이 자신의 늙음과 부덕함을 들어 사양하고 그 대신 김춘추를 천거하였다. 이에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이 되는데, 당시 나이가 52세였다.


무열왕은 즉위하던 해에 우선 아버지 용춘을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어머니 천명을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추증하였고,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개정하는 등 제도개편을 계속하였다.


655년에 원자인 법민(法敏)을 태자에 책봉하고, 아들 문왕(文王)을 이찬(伊湌)으로, 노차(老且 또는 老旦)를 해찬(海飡)으로, 인태(仁泰)를 각찬(角飡)으로,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각각 이찬으로 관등을 올려줌으로써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656년에는 당에서 귀국한 김인문(金仁問)을 군주(軍主)에, 658년에는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문왕을 집사부 중시(中侍)에 새로이 임명하는 등 친족을 주요요직에 배치함으로써 지배체제의 공고를 지속적으로 추구하였다.


그리고 660년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신라의 청병 요청을 받아들인 당의 군대와 함께 본격적인 백제 정벌을 추진하였다. 이는 수차례에 걸친 고구려 정벌의 실패를 경험했던 당이 고구려 정벌의 방법을 변화시킨 것에서 비롯된 것인데, 다양한 길을 통한 고구려 정벌을 위해서 우선 고구려 후방의 백제를 치려는 작전을 마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3월에 당의 소정방을 비롯한 수륙 13만명이 백제를 공격하고, 5월에 무열왕은 태자 법민과 유신·진주(眞珠)·천존(天存) 등과 더불어 친히 정병 5만명을 이끌고 당군의 백제 공격을 응원하였다. 7월에 김유신이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階伯)이 이끄는 5,000명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당군과 연합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泗歷城 :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을 함락시켰다. 이어서 웅진성(熊津城 :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으로 피난했던 의자왕과 왕자 부여융(扶餘隆)의 항복을 받아내어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켜 642년 딸 고타소가 죽은 원한을 갚았다.


사비성 함락 후, 9월에 당은 유인원(劉仁願)의 1만명과 김인태(金仁泰)의 7,000명의 군대로 하여금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10월에 무열왕은 친히 백제지역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이례성(尒禮城 :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 등 20여 성을 친정하여 함락시켰다. 


신라가 백제 정벌에 몰두하던 시기에 고구려의 신라변경 침입이 자주 발생하였는데, 고구려는 660년에 신라의 칠중성(七重城 : 지금의 경기도 적성)을 공격하였다. 


661년에는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군과 연합해 술천성(述川城 : 지금의 경기도 여주)을 공격하고 다시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성주인 대사(大舍) 동타천(冬厄川)이 효과적으로 방어했으므로 무열왕이 관등을 대나마(大奈麻)로 높여주었다. 


이 해에 압독주(押督州 :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를 대야(大耶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로 다시 옮기고 아찬 종정(宗貞)을 도독에 임명함으로써 정복된 백제지역의 관리에 힘썼다. 


재위한 지 8년만에 죽으니 나이 59세였다. 장자인 법민이 뒤를 이어 문무왕이 되었다.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무열(武烈)이며, 묘호(廟號)는 태종이다. 


『삼국사기』에는 문명과 사이에 법민·문왕·노차·인태·지경·개원을 얻었다 전하고, 『화랑세기』에는 법민· 인문·문왕·노단·지경·개원을 얻었다 전하고 있다.

 



비담(毗曇 | ?∼647) : 신라 중고기의 귀족, 반란자


가계는 미상이나 상대등을 역임한 것으로 보아, 골품은 진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645년에 상대등에 되었다. 647년에 선덕여왕이 정치를 잘하지 못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스스로 왕위에 즉위하고자 염종(廉宗) 등과 함께 명활성(明活城)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초기에는 대치 8일만에 선덕여왕이 죽고, 유성이 월성(月城)으로 떨어지는 등 반란군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김유신과 24세 풍월주인 천관(天官) 등의 토벌군에 의해 반란군은 곧 진압되었다. 반란에 연좌되었던 30여명은 진덕여왕 즉위년(647년)에 모두 죽임을 당하였으며, 특히 비담의 경우는 9족이 멸하였다. 


비담과 염종의 난의 원인은 두 가지로 추정되는데, 하나는 국왕세력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발이고, 다른 하나는 혈족간의 대립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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