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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장군과 연개소문


[김유신]


본관 김해, 아버지는 소판·대량주도독을 역임한 서현, 어머니는 숙흘종의 딸 만명, 본래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12대손입니다.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이었고 조부는 신주도 행군총관을 지낸 명장 김무력이었습니다. 김유신은 609년(진평왕 31)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라 불린 낭도를 이끌고 화랑정신을 길렀고, 611년과 이듬해 중악과 인박산에서 삼국통일을 기원하고 무술을 닦은 뒤 국선이 되었습니다.

 

629년(진평왕 51) 8월 이찬 임영리 등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할 때 중당의 당주로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때 적군의 역습을 받은 아군의 사기가 떨어져 싸움이 불리해지자 아버지 소판 서현에게 "제가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하고 홀로 적진으로 돌진하여 적장의 머리를 베어 옴으로써 승리의 기틀을 잡아 대승을 거두게 하였습니다. 642년(선덕여왕 11) 압량주 군주가 되었고, 644년 소판 벼슬에 올랐습니다. 같은 해 9월 상장군이 되어 백제의 가혜성 등 7개 성을 쳐 이기고 이듬해 1월에 개선하였습니다.

 

그런데 왕을 알현하기도 전에 매리포성이 백제군의 맹공을 받고 있다는 파발에 곧장 상주장군이 되어 출전, 요격하여 크게 무찔렀습니다. 647년(진덕여왕 1) 1월 여왕을 폐하려고 난을 일으킨 귀족회의 수뇌인 상대등 비담과 염종의 반군을 토벌하였고, 10월 무산 등 3개 성을 공격해 온 백제군을 보병·기병 1만으로써 크게 격파하였습니다. 이듬해 압량주 군주로서 전날 백제에게 빼앗긴 대량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이어서 악성 등 12개 성을 빼앗았으며, 그 공으로 이찬 벼슬로 승진하고 상주행군대총관이 되었습니다.

 

649년 8월에는 석토성 등 7개 성을 공격해 온 백제의 장군 좌평 은상을 무찔렀습니다. 654년 3월 진덕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재상으로 있던 이찬 알천과 의논하여 이찬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이듬해 9월 백제의 도비천성을 공략하였으며, 이때 백제왕의 문란한 정치를 보고 백제를 멸할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습니다. 660년(태종무열왕 7) 1월 상대등에 올랐고, 7월 신라 정예군 5만과 소정방이 이끈 당나라군 13만이 연합하여 사비성 함락하여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661년(문무왕 1) 7월 나당 연합군과 함께 고구려를 정벌하러 가는 도중인 9월 옹산성에 있는 백제의 잔적을 토벌하고, 12월 당나라군의 군량미를 실어다 주었으나 당나라군의 철수로 고구려 정벌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663년 8월 백제의 부흥군을 두솔성에서 대파하였고, 665년 당나라 고종으로부터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에 봉해졌습니다.

 

667년(문무왕 7) 왕을 따라 당나라군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11월 환군하였습니다. 이듬해 9월 나당 연합군으로 평양을 칠 때 연합군 대총관이 되었으나 왕명으로 금성에 남아 국방을 도맡았습니다. 고구려 정벌 직후 태대각간의 최고직위에 오른 후 당나라 군사를 축출하는 데 힘써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수복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져 놓았습니다. 673년(문무왕 13) 7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금산원에 장사지냈고, 835년(흥덕왕 10) 흥무대왕에 추존되고 경주 서악서원에 제향되었습니다. 

 


[연개소문] 

 

동부대인 태조의 아들로, 개금·개소문이라고도 합니다. 중국의 기록에는 천개소문으로 나오는데, 이는 당나라 고조의 이름이 이연이어서 '연'자를 '천'으로 바꾼 것으로 보입니다. 막리지이자 대대로인 아버지가 죽자 연개소문이 그 직을 세습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그의 성격이 포악하여 귀족들이 반대하였습니다. 귀족들에게 간청하여 막리지가 되었습니다. 642년(영류왕 25)에 변방의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때 영류왕과 귀족들은 연개소문를 살해하려고 했으나 그 계획을 연개소문이 눈치채고 주연을 베풀어 대신과 대인 180여 명을 죽이고 영류왕을 시해, 보장왕을 옹립하였습니다. 연개소문은 스스로 대막리지를 신설하고 취임하여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신라의 김춘추가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였으나 거절하고 신라와 당나라의 교통로인 당항성을 점령하였습니다. 644년(보장왕 3) 신라와의 화해를 권고하는 당 태종의 요구를 물리치고 그 사신 장엄을 구속하는 등 강경책을 쓰자 이에 격노한 당 태종이 645년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습니다. 그는 고구려군을 지휘하여 개모성·요동성·백암성 등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고 마침내 안시성의 혈전에서 60여 일 간의 공방전 끝에 당군을 격퇴하였습니다. 그후에도 4차례나 당나라의 침입을 받았으나 이를 모두 막아냈습니다.

 

한편 이보다 앞선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도교의 도사 8명과 《도덕경》을 들여오는 등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의 강경한 대외정책은 고구려의 국력을 소모시켰으며 귀족이 연합한 정치운영체제를 무시한 독단적인 정치 운영은 고구려 귀족세력의 분열과 이탈을 가져왔습니다. 그가 죽자 아들 남생, 남산, 남건 사이에 막리지 직을 두고 불화가 일어났습니다. 남생은 당으로 망명하였으며 그의 동생 연정토는 12성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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