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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하면 떠 오르는 인물 중 유비 다음으로 유명한 것이 조조일 것이다.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선역인 유비에 대비되어 악역의 대명사처럼 통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조조는 환관 가문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원소나 유표처럼 좋은 가문 출신인 인물보다 시작이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조조가 그런 인물들을 제압하고 북방의 패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이 그만큼 뛰어났기 때문이다.


조조는 뛰어난 무장인 동시에 정치가이고 문학가이기도 했다.


조조의 무장으로서의 능력은 그가 치른 수많은 전투를 통해 이미 입증된 것이기도 하다.

당대 최고의 장수로 평가 받던 여포를 잡아 죽였고 관도에서 하북의 패자였던 원소를 무릎 꿇렸으며 유표의 지배를 받던 형주를 점령했었다.

이외에도 수차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정치가로서의 조조는 둔전제를 실시해서 황폐해진 지역을 개간함과 동시에 백성들을 구제했고 구품관인법을 실시해서 널리 인재를 구하게 했다.

때문에 조조가 다스리던 지역은 일찍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문학가로서의 조조는 그가 그의 아들 조비, 조식과 함께 삼조라고 불리우며 당대 최고의 시인 중 하나로 꼽힐 정도였다.

거기에다 춘추전국시대에 손무가 지은 손자병법에 주석을 달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맹덕신서라는 병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이렇게 뛰어난 면이 많은 조조지만 그 역시 인간인 만큼 여러가지 실수를 저질렀었다.


동탁 토벌시 무리한 공격으로 동탁의 부하장수인 서영에게 대패를 당한 적도 있고 부하이자 친한 친구인 장막의 배신으로 여포에 의해 근거지인 연주를 빼앗기기도 했었다.

항복한 장수를 경계하지 않았다가 아들인 조앙과 조카인 조안민 그리고 아끼는 장수인 전위를 잃었고 적벽에서는 손권,유비 연합군(실질적으로는 손권군)에 의해 대패를 당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그런데 조조의 이러한 실수 중에서도 가장 큰 실수 두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형주를 얻고 무리하게 동오까지 침입한 것이고 또 하나는 한중의 장노를 굴복시킨 이후에 촉을 공격하지 않은 것이다.



첫번째 큰 실수인 동오 공격.


옛말에 강노지말(强弩之末)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한나라 때의 고사에서 나온 말로 아무리 강한 화살이라도 최후에는 힘이 떨어져 얇은 비단조차 뚫을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제갈량이 손권을 안심시키기 위해 언급한 것처럼 이 당시 조조의 군대는 강노지말과 같은 형태였다.


관도대전이 200년의 일이고 202년에 원소가 죽자 원담과 원상 사이에 내분이 일어난다.

조조는 이 기회를 틈타 이들을 토벌했고 원담은 죽고 원상과 원희는 살아남아 오환으로 도망간다.

이후 조조는 원소의 잔여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오환을 정벌했는데 이것이 207년 여름의 일이었다.

그런 이후 승상의 자리에 오른 조조는 군사를 돌려 형주 정벌에 나서게 되는데 죽은 유표의 뒤를 이은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한 것이 208년 9월의 일로 변변한 싸움도 없이 형주 전역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적벽대전은 208년 10월의 일이다.


관도대전 이후로도 거의 매 해마다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조조의 군대가 강군이라고 해도 이렇게 오랜 동안 전투를 계속하게 되면 지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조조군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육군이었다.

이에 반해 손권군의 중심은 수군이었으며 동오를 침범하기 위해서는 장강이라는 거대한 강을 건너야 했다.

그만큼 수군의 중요성이 강조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조조가 이런 문제점을 간과한 것은 아니었다.

조조는 형주에서 항복한 군사들로서 수군을 대신하게 하였고 여타 다른 문제들은 강한 육군과 수의 우세로 상쇄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그 패배가 삼국지연의에서처럼 화공에 의한 패배든 정사에 나온 것 처럼 전염병에 의한 것이든 패배한 것은 패배한 것이다.

이로 인해 북방에서의 승리한 여세를 몰아 남방까지 점령하려던 조조의 야심은 한 풀 꺽일 수 밖에 없었다.

조조는 쫓겨 돌아가면서 곽가가 살아있었다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으리라 하고 한탄하는 장면이 있는데 조조는 이때서야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조조가 적벽에서 패함으로써 호족 정권의 연합체와 같았던 동오에서 손권의 영향력이 매우 강해졌다.

동오는 지방 호족들의 연합체와 같았고 그 수장을 손권이 맡고 있었다.

주유나 노숙, 육손 같은 인물들은 모두 동오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이기도 하다.

적벽 대전 이전에는 그들의 영향력이 매우 강했지만 적벽 대전에서의 승리로 손권의 영향력이 강해질 수 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손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화의 기틀이 마련되었다는 것이고 이것은 이후 조조가 다시 침입해 들어가기가 매우 어려워졌다는 것을 뜻한다.


거기에다 형주를 상실하게 되었다.

형주는 그 위치로 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조조 입장에서는 남방 진출의 교두보이자 낙양이나 허창의 방어를 한결 쉽게 해주는 방어선 역할을 하는 곳이고 손권 입장에서는 북방 진출의 교두보이자 종으로만 길게 뻗어있는 영토에 살을 붙여주는 역할을 하는 곳이기도 하고 파촉으로 진출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했다.

조조는 이런 지역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관우가 번성을 공략할 당시 크게 위협을 느껴 천도까지 고려했던 것이다.


여기에 조조 자신이 위험한 인물이라고 경계했던 유비가 세력을 키우게 만들었다.

조조가 형주를 차지하고 손권과 화평을 맺었다면 유비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을 것이다.

화평의 조건으로 유비의 양도를 원했다면 손권은 두말없이 이를 받아들였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유비는 살아남았고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에 따라 촉까지 차지해서 삼국 정립을 이뤄낸다.

이로 인해 조조에 의한 삼국통일은 요원한 일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조조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조조는 형주를 점령한 시점에서 일단 군사를 쉬게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호족 연합체인 동오 정권에 내분을 유도해서 힘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또한 산월의 세력을 이용해 동오를 흔들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산월은 동오 정권에 매우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적당히 원조를 해주면서 충동질을 한다면 동오의 후방을 어지럽히는데 매우 큰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강력한 육군으로 손권군의 침입을 저지하기만 한다면 손권군으로써는 북방으로 진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삼국 정립 이후에도 손권은 여러 차례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 공략에 나서지만 번번히 패하기 일수였다.

조조군의 입장에서는 일단 방어 위주로 나가게 되면 손권군의 공격은 그리 큰 위협이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인구 문제도 있다.

삼국시대 후기로 가면서 중원이 안정되자 중원의 난을 피해 강남으로 피신을 했던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 벌어진다.

이로 인해 오나라는 심각한 인구 부족에 빠지게 되었고 때문에 군사의 수도 적을 수 밖에 없었다.

섬나라 야만족(대만이라는 설도 있고 일본이라는 설도 있음)들을 잡아와서 군사로 쓸 생각까지 했으니까 말이다.(물론 실패했다.)

만약 조조가 형주를 점령한 시점에서 더 이상 진출하지 않고 중원의 안정화를 꾀했다면 이런 현상은 더욱 일찍 일어났을 것이고 쉽게 강남을 병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두번째 큰 실수인 파촉 공격 보류


장노가 차지하고 있던 한중을 공략해서 쉽게 승리한 조조에게 사마의와 유엽은 이 기회에 파촉까지 공격할 것을 건의한다.

하지만 조조는 "사람은 만족할 줄 모르기에 고뇌가 있는 법이오. '이미 농을 취했는데 또 촉을 바란다'는 식이로군."이라고 말하며 거절한다.

이 고사는 후한 광무제가 농의 외효를 깨뜨린 이후 여세를 몰아 촉의 공손술을 쳐서 중국을 통일한데서 나온 고사이다.

조조는 이런 고사를 들어 농담을 하며 신중을 기하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서두르다 적벽에서 패배한 기억을 떠올린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평소의 조조와는 다른 판단이었다.

지키기보다는 앞서 싸우기를 즐겨했던 조조라는걸 생각하면 이 때의 반응은 이전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조는 한중까지 점령했기 때문에 파촉 땅의 유비를 봉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유비의 가신인 양홍이 말한것처럼 한중은 사천 전체의 목구멍과 같은 곳으로 이곳을 제압하면 이후 사천 공략에 무리가 없을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


하지만 조조의 판단은 이번에도 빗나가 버렸다.

216년 조조는 위왕이 되었는데 그리고 조비와 조식 사이에 태자의 자리를 놓고 암투가 일어나 위의 내부는 시끄러웠다.

유비는 이 혼란을 이용해 한중을 침공했고 결국 하후연을 죽이는 등 조조군을 격파하여 한중 전역을 손에 넣게 된다.

유비는 한중을 손에 넣고 한중왕의 자리에 오르는 등 자신의 입지를 튼튼하게 다지게 된다.


조조가 파촉을 공략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유비는 파촉을 안정시켜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그리고 형주 문제로 대립하고 있던 손권에게 형주 3군을 양도하여 화해를 이루어냈다.

거기에 한중까지 손에 넣어 장안을 가시권에 넣게 된 것이었다.


그러면 조조가 파촉을 공략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까.


당시는 유비가 유장으로부터 파촉을 넘겨받은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런만큼 유비는 파촉의 호족 및 토착민들의 충성심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그것은 형주에서 끌고 온 병사들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소리와 같다.

게다가 형주군의 반은 형주를 지키기 위해 관우가 거느리고 있었다.

또한 손권과는 형주 영유 문제로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조가 형주를 오에 넘긴다는 조건으로 동맹을 요구했다면 손권이 응했을 수도 있다.

물론 조조의 파촉 영유를 더 위협적으로 생각해서 위를 공격했을 수도 있지만 조조에게는 오의 공격을 막을 충분한 여력이 있었다.


지리적으로도 한중을 차지하고 있는 조조군이 유리했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한중은 사천 지방의 목구멍과 같은 곳으로 한중을 통하면 사천 전체로 통할 수도 있었다.

물론 파촉의 지형이 험하기는 하지만 유비의 형주군으로 전체 지역을 방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유장에게서 항복한 군사들을 쓸 수밖에 없는 노릇이고 이는 공작 여하에 따라 조조군에 항복하게끔 유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비의 평판이 좋다고는 하지만 토착민들에게 유비는 원래 지배자인 유장을 몰아낸 침략자로 인식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조조의 파촉 공략은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조조는 그러지 않았고 결국 유비에게 힘을 기를 기회를 주고 말았다.



형주 점령 후 무리하게 동오를 공격한 것과 한중을 점령하고 파촉을 취하지 않은 이 두가지 실수가 삼국 정립의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조조의 여러가지 다른 실수는 그의 능력과 휘하 장수, 모사들의 역량으로 극복이 되었지만 이 두가지 실수만은 극복하지 못하고 천하통일을 훨씬 훗날로 미루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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