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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은 금관가야왕실의 후손으로 김수로왕의 12대손인, 가야의 왕족출신입니다

할아버지는 김무력 아버지는 김서현장군으로 가야가 신라에 병합될때 진골신분을 하사받았지만 기존의 진골세력에게 차별을 받았습니다

김유신은 청소년기 화랑으로서 삼국통일의 원대한 뜻을 품었으나 당시 신라의 정치적 상황은 고구려와 백제에게 밀려 나라의 존립이 위태롭던 상황이었습니다

김유신은 고구려 백제와의 잦은 국지전에서 나름대로 선전을 하기도 했으나 근원적으로 역부족이었던 신라는 김춘추가 대당외교를 통한 국면전환에 성공함을 기점으로 백제와 고구려에 공세적위치를 점하므로서 삼국통일을 위한 첫 발을 내 딪는습니다

그가 연이은 출전으로 전장에서 오자마자  또다시 전장으로 출전해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집앞을 지나는 출전중에도 집에 들러지 않고 집의 우물물 한그릇만 맛보고 바로 출발한 고사는 그의 부하들에 대한 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를 잘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그는 신라가 당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게 김춘추와 일조를 했고 진덕여왕 사후 김춘추는 김유신의 군사력의 보이지 않는 도움을 얻어 불리한 왕위계승순위임에도 왕위에 오릅니다

부하들의 심리를 용병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 화랑관창 반굴의 희생을 바탕으로 계백의 5000결사대와의 황산벌싸움을 승리하고 백제도성으로 진군하여 당군과 합류하였으나 소정방이 기일에 늦은 점을 빌미삶아 부하신라장수의 목을 치려하자 먼저 당군과 싸우고 백제를 치겠다고 대항하여 소정방의 기를 꺾었습니다

 

백제멸망후 당이 신라지배세력의 분열을 위해 김유신등에게 백제땅을 식읍으로 주려하자 이를 거절하였으며 이 거절은 중국역대황조 개국공신들의 논공행상다툼과 큰 비교가 됩니다

 

고구려멸망후 당이 백제는 물론 신라까지 지배야욕을 드러내자 고구려 백제부흥군과 연합하여 결의에 찬 대당전쟁을 시작하고 둘째아들 김원술이 당과의 전쟁에서 패했으나 살아돌아오자 참수를 하려한 사건은 그의 노블리스오블리제와 대의를 위한 충성심을 만천하에 알린 사건입니다

 

그는 673년 당군의 축출을 보지 못하고 전쟁중에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정신을 이어받은 신라와 고구려,백제유민연합군은 675년 매초성과 676년기벌포에서 수십만 당군을 격파하고 마침내 완벽한 자주국가를 이룩하였습니다

 

이후 통일신라의 흥덕왕은 이례적으로 그를 흥무대왕으로 추존하여 신라에서의 그의 업적을 길이 남겼습니다

 

김유신의 업적을 조금 더 요약하면 삼국과의 전쟁에서 움추려 있던 신라의 상황에서 신진세력인 김춘추와 연합하여 당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일조했고 수세에 있던 국지전을 훌륭하게 수행해서 공세전환의 교두보를 확보했으며 불리한 계승순위의 김춘추를 신라왕으로 옹립하는 군사적배경을 제공했습니다

또한 당군과 대등한 입장에서 백제통일전쟁을 수행했고 대의와 충성으로 당의 신라분열정책을 막아냅니다

아들의 패전도 용서하지 않는 노블리스오블리제로 국민의 단합을 이끌어내어 대당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을 제공하고 신라의 자주국가형성에 기여했습니다

민족사적으로 삼국통일을 이루는데 일등공신이라 평가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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