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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장군과 김유신장군에 대해..



계백장군


■?∼660(의자왕 20) 

■ 백제 말기의 장군 




황산벌의 한 / 나라와 더불어 죽은 자 


▶ 황산벌의 한 


계백(伯)이라고도 표기한다. 관등은 달솔(達率)이다. 660년 김유신(金庾信)과 소정방(蘇定方)의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炭峴:지금의 大田 동쪽 馬道嶺)과 백강(白江)으로 진격해오자, 결사대 5천인을 뽑아 거느리고 황산(黃山:지금의 連山)벌에 나가 5만여 신라군을 맞이하였다. 


그는 전장에 나아가기에 앞서 “한 나라의 힘으로 나·당의 큰 군대를 당하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자가 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욕보는 것이 흔쾌히 죽어 버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고는 처자를 모두 죽이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것을 각오하였다.


또한, 병사들에게도 “옛날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5천명으로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70만대군을 무찔렀다. 오늘 마땅히 각자 분전하여 승리를 거두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고 격려하였다. 


그의 결사대는 험한 곳을 먼저 차지하여 세 진영으로 나뉘어 신라군에 대항하였다. 목숨을 버릴 것을 맹세한 5,000 결사대의 용맹은 신라의 대군을 압도할 만하였다. 그리하여 처음 신라군과의 네번에 걸친 싸움에서 모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반굴(盤屈)·관창(官昌) 등 어린 화랑의 전사(戰死)로 사기가 오른 신라의 대군과 대적하기에는 그 수가 너무나 적었다. 결국, 백제군은 패하고 계백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




▶ 나라와 더불어 죽은 자 


계백의 이러한 생애는 후대인들의 높은 칭송의 대상이 되었고, 특히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에게는 충절의 표본으로 여겨졌다.


한편, 권근(權近)은 계백이 출전하기에 앞서 처자를 모두 죽인 것이 오히려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결국 패하는 결과를 낳게 한 것이며, 계백의 그러한 행동은 난폭하고 잔인무도한 것이라고 평하였다. 그것은 특이한 견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서거정(徐居正) 등은 계백의 행동을 높이 평가하여 “당시 백제가 망하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기에 자신의 처자가 욕을 당하지 않도록 몸소 죽이고, 자신도 싸우다가 죽은 그 뜻과 절개를 높이 사야 한다.”고 하였다. 더구나, 백제가 망할 때 홀로 절개를 지킨 계백이야말로 옛 사람이 이른바 “나라와 더불어 죽는 자”라고 칭송하였다. 



■ 595(진평왕 17)∼673(문무왕 12) 

■ 신라의 장군. 대신(大臣)






김유신장군


가계 / 빛나는 전공 / 정치적 비중/ 반란 진압 / 당나라 계략에 맞서 / 자신을 다스린 자세 


▶ 가계 


증조부는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왕이며, 할아버지는 무력(武力), 아버지는 서현(舒玄)이다. 


신라에서 금관가야 왕족의 후예들은 신라왕족의 김씨(金氏)와 구별하여 신김씨(新金氏)라 칭하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어머니의 증조부는 지증왕, 할아버지는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 아버지는 숙흘종(肅訖宗)이다.


숙흘종은 만명을 감금하면서까지 서현과의 혼인을 반대한 바 있다. 그것은 신라에 투항한 가야왕족이 당시에 비록 진골귀족(眞骨貴族)으로는 편입되어 있었지만, 왕족출신과 통혼할 만한 대귀족은 되지 못했던 때문으로 보인다. ▲



▶ 빛나는 전공 


낭비성(娘臂城) 공격 



그가 세운 큰 전공으로 전하는 것은 629년 34세 때부터 나타난다. 당시 신라군은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했는데, 1차 접전에 패배하여 전의를 잃고 있었다. 이 전투에 그는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출전하여 단신으로 적진에 돌입하여 유린함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워 크게 승리하는 데 공을 세웠다.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김춘추가 종전에 적대관계에 있기도 했던 고구려로 청병하러 가기에 앞서, 교섭과정에서 일어날 위험에 대해 김춘추는 그와 상의하고, 서로 목숨을 건 맹세를 했다.


그들은 당시에 신라 조정에서 아직 최고서열에는 들지 못했지만, 보수적 신라귀족들의 성향에서 보면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될 그들의 정치적 결속이 이미 여기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 무렵의 주(州)는 지방행정단위로서보다는 군사작전 구역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고, 주에 파견된 군주도 지방주둔군 사령관으로서의 성격이 컸다.


642년 김춘추가 고구려를 향해 떠날 때에는 압량주(押梁州: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의 군주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신라에서 군사의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의 활약이 뚜렷이 나타난다.▲ 



원정과 일화 



644년에는 소판(蘇判)이 되었고, 그해 9월에 상장군으로 백제 원정군의 최고 지휘관이 되어 전략상의 요충인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동화성(同火城) 등 7개성을 점령하였다.


이듬해 정월에는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백제가 매리포성(買利浦城)에 침입하였다는 급보를 받고 가족도 못 만난 채 다시 출전하여 승리하였다. 그리고 그 해 3월에도 귀환하기 전에 또 백제의 침입으로 출동하였는데, 이때의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당시 전열을 정비하여 즉시 떠나게 되자, 가족들이 문밖에 나와 기다리는 앞을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쳐 50보쯤을 가서야 말을 멈춘 뒤, 집에서 물을 가져오게 하여 마셨다. 그리고 “우리집 물이 아직도 예전 같은 맛이 있다.”고 말하고는 출발하였다. 


이에 군사들이 모두 이르기를, “대장군도 이러하거늘 우리들이 어찌 가족과 떨어짐을 한스럽게 여기겠는가.”하고는 분발하여 나아가니, 백제군이 그 기세만을 보고도 퇴각하였다고 한다.


663년에는 백제부흥을 꾀한 백제유민과 그들을 지원한 왜(倭)의 연합을 격파하였고, 664년에도 백제유민이 사비성에서 봉기하자 은밀한 계책을 일러주어 평정하였다. 


661년(문무왕 1) 6월에 고구려를 원정하였다. 이 원정에서는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군량이 떨어져 곤경에 처한 당나라 군대를 지원하려고 고구려 중심부까지 왕복하는 결사적인 수송작전을 하고, 당나라 군대가 퇴각하자 이듬해 정월에 고구려군의 매복과 추격을 물리치고 돌아왔다.▲ 





▶ 정치적 비중




그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668년에 신라군의 총사령관이라 할 대총관(大摠管)이 되었다. 그러나 늙고 쇠약하여 병으로 원정에 참가하지는 못하고, 왕경(王京)에 남아 왕까지 원정을 떠난 신라 국내의 통치를 담당하였다. 


문무왕과의 생구관계(甥舅關係) 뿐만 아니라, 고구려 원정군의 수뇌인 김인문과 김흠순도 생질과 아우였던만큼 그는 국가의 원로로서 고문과 지도적 구실을 하여 신라 진영의 단결과 전략수립에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를 평정한 직후에는 다시 한 등급을 높인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이 제수되고, 여러가지 특전을 부여한 포상이 있었다. 그뒤 자신이 직접 일선에서 정치나 군사적 일을 수행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신라 지배층의 원로로서의 자문역할은 계속한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 멸망 후 본격화된 당나라와의 투쟁에서도 지도적인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672년 석문(石門) 벌판의 전투에서 신라군이 당나라에 참패했을 때 문무왕이 그에게 자문을 구했음이 나타난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747년 소발률국(小勃律國)을 원정하고 돌아온 뒤부터였다.


당시 백제의 지휘관급 100인과 군졸 8, 900여인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전투용 말 1만필을 노획했다는 전과를 고려할 때, 신라 쪽에서도 주력부대를 투입한 대규모 방어군단의 편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휘관 편성에서도 대장군에 김유신, 그 아래 장군들에 진춘(陳春), 죽지(竹旨), 천존(天存) 등이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당대의 명장들이자 정치적으로도 큰 비중을 가지는 인물들이었다.


태종무열왕의 즉위 후 그의 정치적 비중은 더욱 높아졌다. 신라본기에는 태종무열왕의 즉위 다음해의 관등이 대각간(大角干)으로도 나타난다. 그해 10월에 태종무열왕의 셋째딸 지소와 혼인하였다. 이는 태종과의 결속이 더욱 긴밀해짐의 반영인 동시에 종전과는 달리 가야계 출신으로서의 제약을 벗어나 왕실과도 통혼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660년 정월에는 귀족회의의 수뇌인 상대등이 되어, 그는 삼국통일 전쟁과정의 신라를 이끄는 중추적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해에 신라군을 이끌고 당나라 군대와 함께 백제를 멸하였다. 태종무열왕을 뒤이은 문무왕의 즉위 뒤에도 정치적 비중은 약화되지 않았다.▲



▶ 반란 진압 


또한, 647년에는 귀족 내부의 반란 진압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특히, 그 반란의 결과는 그뒤 신라 정계의 변화에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으로 보인다. 반란세력의 우두머리는 당시 귀족회의의 장인 상대등 비담(毗曇)이었다. 그들은 “여왕은 정치를 잘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명활성(明活城)을 거점으로 월성(月城)의 왕족세력을 공격하였다.


반란군과 대치한 지 8일 만에 선덕여왕이 죽는가 하면, 흉조라고 믿고 있던 유성(流星)의 추락이 월성 쪽에 있어, 왕실측의 사기는 위축된 반면, 반란군의 사기는 충천해 있었다.


이때 이치로써 새로 등극한 진덕여왕과 귀족들을 설득하는 한편, 종교적인 제전과 계략으로 왕실 쪽 군중의 사기를 북돋워 반란군과의 결전에서 승리하였다. 반란이 진압된 뒤 상대등이 된 알천(閼川)도 전통적 신라의 귀족이었다. 반란의 진압에서 전통적인 귀족들의 힘도 컸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가야계 출신으로 신라 중앙정부의 운명을 결정함에 큰 구실을 했고, 또 그로 인하여 그의 영향력도 커질 수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비담의 반란 후 진덕여왕대에 세 차례의 대규모 전투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전투들의 최고지휘관을 맡았다. ▲ 




▶ 당나라 계략에 맞서



그는 일찍부터 당나라의 대국주의 야욕을 경계하고 그에 대비하고 있었다.


660년에는 백제군의 결사대를 격파하느라 당나라군과의 합류지점에 늦게 도착함을 빌미로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신라 장군의 참수(斬首)를 명하여 신라군의 통수권을 장악하려 하자, 그는 단호히 먼저 당나라군과 결전하겠노라 맞서 소정방의 기도를 꺾은 바 있다. 


또한, 백제가 정복된 해에는 소정방이 그와 김인문에게 백제지역을 분봉(分封)해주겠다고 유혹함으로써, 신라 지배층의 분열을 획책하며 신라를 침공할 기회를 노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같은 유혹을 거절하여 신라 지배층의 결속을 굳힘으로써 당나라의 계략을 무산시키는 한편, 고구려가 엄존하는 상황에서 정면대결을 피해 신라군을 백제유민군으로 위장하여 당나라군의 행동에 군사적인 대처를 하였다. 당시 소정방은 신라는 상하가 굳게 결속되어 작지만 쉽게 정복할 수 없다고 본국에 보고하였다한다. 


그 뒤에도 당나라는 665년에 봉상정경평양군 개국공식읍이천호 (奉常正卿平壤郡 開國公食邑二千戶)로 봉하는 등 유혹의 손길을 뻗쳤다. 국제관계 속에서 당나라가 신라에 대해 노리고 있는 것을 파악하고 대처함으로써 당나라의 침략을 분쇄할 수 있었다.▲


▶ 자신을 다스린 자세



그는 스스로를 엄격히 단속하며, 신라 다중(多衆)의 결속과 사기를 북돋기 위해 한결같이 노력하였다.



연속되는 출정에서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앞을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친다든가, 


혹독한 추위 속의 행군에 지친 군사들의 앞을 어깨를 드러내놓고 앞장선다거나,


아들인 원술이 당나라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해 오자 왕에게 참수형에 처하라고 건의하고 끝까지 용서하지 않은 일,

등은 스스로를 엄격히 단속하며 신라 다중의 사기를 북돋우려 노력한 것의 단면들이다. 



그가 죽자 왕은 성대한 의장을 갖추어 금산원(金山原:지금의 경주시 송화산 기슭으로 추측됨.)에 장사지내게 하고, 비를 세워 공적을 기록하게 했다 한다. 뒤에 흥덕왕(삼국유사에는 경명왕 때라 함.)은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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