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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들의 피를 이용한 치료방법 


옛날 로마시대의 귀족들은 젊고 씩씩한 검투사의 피를 마시면 회춘한다고 믿고 피를 마셨다고 합니다. 성서의 구약시대에도 피를 많이 마신 것으로 추측됩니다. 얼마나 많이들 피를 먹었는지 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가 구약성서의 여러 곳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되는 피 채 먹지 말 것이니라 (창세기 9:4)"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 중에 아무도 피를 먹지 말며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라도 피를 먹지 말라 (레위기 17:11-12)"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아울러 먹지 못하리니 (신명기 12:23)" 


아주 오래전부터 전승되어 내려온 피를 이용한 치료방법들이 있습니다. '나쁜 피'를 뽑아내면 뭔가 몹쓸 병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피를 뽑아 내는 치료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옆의 그림은 항아리에 담아 놓은 거머리에게 피를 빨려 병을 고치려는 장면입니다. 피를 뽑아내는 치료방법은 고대 이집트시대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이용되었다니 놀랍지요. 이집트의 파라오가 병(elephantiasis)을 고치기 위해 피로 목욕을 하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개의 피를 마심으로써 공수병을 치료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옛날 노르웨이에서는 간질과 괴혈병의 치료방법으로 물개 또는 고래의 피를 마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전설에 의하면 15세기 후반에 만성 신장 질환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던 교황을 치료하기 위하여 세명의 소년들의 피를 빼서 교황에게 넣어주는 치료를 시도하였으나 효과는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최초의 수혈과 수혈 금지령 


피를 뽑아내거나 바르거나 혹은 먹거나하는 것이 아니라 피를 혈관내로 주입하는 방법, 즉 수혈이라는 것은 1628년에 William Harvey에 의해 혈액이 우리 몸 속에서 어떻게 순환하는지에 대해 규명된 이후에야 시도할 수 있었습니다. 최초의 수혈은 1665년 2월에 Richard Lower라는 영국 의사에 의해 시행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옥스포드대학에서 그는 두 마리의 개를 가지고 실험을 하였는데 한쪽 개의 목에 있는 동맥을 다른 개의 정맥에 연결한 후 혈액이 주입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수혈 실험이었습니다. Lower는 또한 죽기 일보 직전까지 피를 흘리게 한 개에게 다시 피를 주입함으로써 완전히 회복시킬 수 있었다는 실험 결과를 얻었습니다. 따라서 Lower는 근대적인 수혈 개념을 최초의 인식하였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667년 11월에 Lower는 미친 병에 걸린 사람에게 '피를 식히기 위하여' 양의 피를 수혈하는 치료를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깝게도 사람에게 수혈한 최초의 사람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사람에게 시행한 최초의 수혈은 이보다 몇개월 전인 1667년 6월에 Lower의 개실험 결과를 읽고 감명을 받은 프랑스 루이14세의 주치의 중 한사람인 Jean Denis라는 젊은 의사가 시행하였습니다. 최초로 수혈받은 환자는 원인 모를 열병을 앓고 있던 15세 소년이었습니다. 이 소년은 여러번에 걸쳐 피를 빼는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으며 수혈후 원기를 회복하였다고 합니다. 옆의 그림은 양의 경동맥과 사람의 정맥을 연결하여 수혈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 당시는 수혈하기 위해서 이처럼 어렵고 복잡한 테크닉이 필요하였습니다. Denis는 같은 해에 여러번 동물의 피를 사람에게 수혈하는 치료를 계속하였는데 이 중 5번째로 시행된 수혈에 대해서는 애절한(?) 사연과 함께 자세하게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하다 미친병에 걸려 파리시내를 알몸으로 돌아다니던 Antoine Mauroy라는 34세 유부남이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 수혈을 받게 되었습니다. Denis는 그 환자에게서 약 300 cc의 피를 빼내고 송아지의 피 170 cc 정도를 환자에게 수혈하였습니다. 이틀후 두번째 수혈이 시행되었는데 첫번째 수혈때보다 많은 피를 환자에게 주입하였습니다. Denis는 수혈 결과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피가 환자의 정맥을 통해 주입되자 환자는 팔에 통증을 느꼈다. 그의 맥박은 빨리 뛰기 시작하였고 얼굴에서는 많은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후 맥박이 뛰는 속도가 크게 변화하였고 양 옆구리와 배가 무척 아프다고 호소하였다. 질식할 것 같다고 해서 환자를 편히 눕혔더니 잠이 들었고 다음날 아침까지 곤히 잠을 잤다. 아침에 깨어나서 소변을 보았는데 그 색깔이 굴뚝 검뎅이가 섞인 것처럼 검었다." 


이것은 인류 최초의 용혈성 수혈부작용에 관한 기록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검은 오줌은 용혈성 수혈부작용 때문이었는데 당시 Denis는 환자의 몸 속에서 환자를 미치게 하였던 나쁜 물질인 '검은 담즙(black choler)'이 빠져나온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어쨋든 환자는 증상이 좋아져서 그의 부인에게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몇달후 환자는 병이 다시 재발하여 부인에게 이끌려 다시 수혈 치료를 받게 되었으나 수혈 장치가 고장나서 수혈을 받지 못했고 가엾은 그 환자는 그날 밤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이 사건후 환자의 부인은 Denis의 업적을 시기하는 파리의 다른 의사들과 함께 남편의 사망에 대해 고소를 하였습니다. Denis는 이에 대해 "그 의사들과 부인은 남편보다 더 수혈을 받아야 될 필요가 있다."라고 답변을 하였으며 결국 Denis의 무죄가 입증되었고 부인이 남편을 독살한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후 William Harvey의 혈액순환설을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보수적이었던 파리의 의사회는 그들의 재가없이는 누구도 수혈할 수 없다는 칙령을 내렸으며 이후 교황도 합세하여 수혈이 금지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 시대에 Denis 등에 의해 시행된 수혈은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수혈은 아니었습니다. 수혈은 부족한 혈액을 보충하기 위한 치료방법이지 미친 사람의 뜨거운 혈액을 식히기 위하여 아니면 회춘을 위하여 시행하는 치료방편이 아닌 것입니다. 아뭏든 이후 수혈은 무려 150년간이나 금지된 채 잠들게 되었습니다. 



James Blundell과 수혈의 재탄생 


오랫동안 금지되었던 수혈이 다시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영국의 산부인과 의사인 James Blundell(1790-1877) 덕분이었습니다. Blundell은 1818년 12월에 위암으로 거의 죽어가던 환자에게 사람의 혈액 약 400 cc를 수혈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것은 인류최초로 사람의 혈액을 사용한 수혈이었다고 인정받고 있습니다. 환자는 일시적으로 증상이 호전되었으나 56시간후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Blundell은 분만후 출혈이 심한 산모의 치료를 위해 수혈이 필요할 것으로 확신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사람의 혈액을 이용한 수혈을 시행하였습니다. 사람의 혈액을 이용한 이유는 동물의 피를 사용하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분만후 출혈 산모를 위한 응급 수혈이 필요한 경우 혈액제공자인 개 또는 송아지를 환자곁으로 빨리 끌고 가서 수혈을 위한 시술을 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Blundell은 말을 잘 알아 듣고 협조를 구하기 쉬운 사람을 혈액제공자로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Blundell이 고안한 장치를 이용하여 분만후 출혈이 심한 산모에게 혈액제공자가 직접수혈(direct transfusion)을 한 적이 있습니다.. 수혈을 받은 산모는 곧 원기를 회복하였고 마치 생명이 자기 몸 안으로 주입되는 것처럼 느꼈다고 합니다. Blundell이 이런 방법을 이용하여 시행한 10예의 수혈중 5예가 성공적이었다고 하였으며 3예는 수혈하는 동안 부작용이 생겼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혈자의 정맥에 염증이 생기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거머리에게 피를 빨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만년에는 수혈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하며 은퇴한 뒤에는 역사속으로 사라졌습니다. Blundell의 영향으로 여러 산부인과 의사들이 분만후 출혈 환자에게 수혈 치료를 감행하였으나 19세기 중엽에는 과연 이런 수혈방법이 환자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논쟁이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의사들이 이런 수혈방법이 위험성이 높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수혈후 회복되었다고 생각한 환자들도 그것이 정말로 수혈에 의한 효과였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48예의 수혈 결과를 분석한 당시의 한 연구에 의하면 무려 18예에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선 당시에는 혈액형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상당수에서 용혈성 수혈부작용이 생겼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또한 직접수혈이라는 시술을 행하려면 혈액제공자의 동맥과 수혈 받을 환자의 정맥을 잇는 어려운 전처치를 해야 하므로 이 과정에서도 여러 합병증이 초래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피가 응고되지 않게 하기 위한 노력들 


피는 몸 밖으로 나오면 응고됩니다. 응고된 피를 수혈할 수 없으므로 할 수 없이 응고되기 전에 빨리 수혈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혈액제공자의 동맥과 수혈 받을 환자의 정맥을 연결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19세기 수혈의 큰 문제점이었습니다. 피가 응고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많은 실험이 진행되었습니다. Sodium bicarbonate 또는 sodium phosphate 등과 섞어 섬유소원을 제거하여 항응고 효과를 보려 했으나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1914년에 와서야 sodium citrate가 항응고 작용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나 이때도 항응고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sodium citrate를 피와 섞어 주어야 했기 때문에 혈액이 희석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Rous와 Turner는 salt, isocitrate 및 glucose를 섞어 항응고보존제를 만들었고 이것은 실제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수혈에 이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항응고보존제는 1943년에 Loutit와 Mollison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들은 citric acid, sodium citrate 및 dextrose를 혼합하여 혈액 희석 효과를 줄인 ACD(acid-citrate-dextrose)를 만들어 혈액이 응고되지 않으면서 21일간이나 보존할 수 있게 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후 1957년에는 CPD (citrate-phosphate-dextrose)가 개발되었고 최근에는 여기에 adenin을 첨가한 CPDA-1을 항응고보존제로 사용하게 되어 적혈구제제를 무려 35일간이나 보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Karl Landsteiner와 혈액형의 발견 


1868년에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난 Karl Landsteiner는 비엔나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이후 병리학자가 되어 면역의 기전 및 항체의 성상 등에 대한 많은 연구업적을 남겼습니다. Hapten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명명하였으며 paroxysmal hemoglobinuria 및 poliomyelitis 등에 대한 병태생리를 규명하는 등 병리학, 조직학, 혈청학 및 면역학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큽니다. 특히 ABO 혈액형의 발견은 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이며 이로 인해 그는 1930년에 노벨상을 받게 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습니다. 동물의 혈액을 사람에게 수혈하였을 때 수혈된 동물의 적혈구가 엉기고 용혈되었다고 보고한 1875년 Landois의 실험 결과를 주목하였던 그는 사람의 혈액을 다른 사람에게 수혈했을 때도 적혈구가 용혈되고 이로 인해 쇼크, 황달 및 헤모글로빈뇨증이 초래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1900년에 Landsteiner는 서로 다른 세가지의 동종응집소 (isoagglutinin)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규명하였고 이듬해에는 마침내 혈액형을 A형, B형, 및 C형(후에 O형으로 이름을 고침)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네번째 혈액형인 AB형은 1902년에 그의 제자인 DeCastello와 Sturli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Landsteiner는 혈액형이 수혈의 성공여부를 좌우할 것이며 또한 혈액형은 유전되므로 친자유무를 확인할 때도 유용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인정되고 실제 수혈에 적용되기까지는 수년이 걸렸습니다. 1907년 뉴욕의 저명한 병리학자였던 Richard Weil 밑에서 당시 인턴으로 일하던 Ottenberg는 Landsteiner의 발견을 중시하였고 마침내 수혈하기전에 환자와 공혈자의 혈액형을 검사하였던 최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Ottenberg는 또한 수혈전에 수혈적합검사(교차시험)를 최초로 시행한 사람으로도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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