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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동(元坪洞)...구미의 상가 밀집지역으로 평평한 돌 가운데 먼저(元) 생긴 들이라는 뜻. 월산(月山)동이라고도 하였으니 금오산에 저녁달이 걸리면 아름답다하여 불려진 이름이다. 이외에도 세부지명으로 돌밭이라는 암전, 각산, 새터, 시장이 서는 장터, 나무시장이 서던 나무전거리, 우시장이 서던 소전거리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광평동(廣坪洞)...마을앞에 넓은 들이 있어서 생긴 이름. 마을 양쪽 산에 소나무가 울창하여 산솔이라고도 불렸으며, 농지와 임야의 대부분이 공단에 편입되었다. 이외에도 마을 주위에 소나무가 많았던 다송마을, 봄이면 살구꽃이 만발하던 새터[花新] 등이 있다.

 

신평동(新坪洞)...새롭게 생긴 들이라는 뜻. 세부지명으로는 사기를 굽던 옹기굴이 있었던 사기점, 나무터 등이 있다. 옛날에는 낙동강 물길이 이곳을 둘러 흘렀다고 하며, 소금배가 이 나루를 이용하여 성시(盛市)를 이루어 김천시장에서도 이곳을 이용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비산동(飛山洞)...원래는 비산(緋山, 붉은빛 비)이라 하였으니, 땅이 붉은 황토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제시대에 한자를 잘못 썼다고(緋-飛)한다. 신라시대에 비산부곡(緋山部曲)으로 낙동강의 호족이(?) 살던 옛터라고 한다. 대부분의 땅이 공단에 편입되었다. 세부지명으로 붉은 무늬가 있는 대나무가 자랐다는 자지기(紫竹), 패기(巴溪), 새뜸(新基), 비산진나루 등이 있다.

 

지산동(芝山洞)...원앞(서원앞)과 삽지[삽제(揷堤), 꼿을 삽, 방죽 제)를 합쳐서 지산이라고 하나 그 이름의 연원이 분명치 않다. 남강서원 앞에 있는 마을이라 원앞으로 불렀다. 샛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서 세운 큰 제방을 쌓은 곳이기에 삽지라고 불렀다. 여우 많은 골짜기라는 여우골(여골), 용이 내려와 목욕하였다는 용댐이(용담), 항상 물이 마르지 않으며 바가지로 물을 떠먹는 박샘 등이 있었다.

 

봉곡동(蓬谷洞)...다붓, 다복이라고도 부르는데, 쑥대가 많아서 다붓이라고 불렀다. 蓬은 쑥이다. 이외에도 조선조의 巨儒 우암 송시열이 방문하여 南極老人星을 보고 지었다는 별남(星南)마을이 있다. 갓골(冠谷)마을은 관례를 치렀다고, 혹은 가(변두리)에 있는 마을이라고, 또는 지형이 의관(衣冠)처럼 생겼다하여 불려진 이름이라 한다. 구미시장으로 가는 고개인 장고개(長峴)마을, 그리고 봉곡에서 김천으로 가는 길에 있던 고개로 참나무가 많았던 참나무재 등이 있었다.

 

부곡동(釜谷洞)...가매실이라고도 부르는데, 지형이 솥(가마 솥 釜)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 집들이 잔디처럼 모여있어 전지율[전쥴, 전지울]이라고 불렀다는 마을, 큰부자가 살았다하여 생긴 이름으로 장재터[장지터, 장자리]마을, 장재터의 주민들이 병자년 수해로 옮겨 새로이 형성된 마을인 새마[새터,新基], 새마을운동 당시 전지율에서 이거하여 새로 터을 닦은 새마을 등이 있다.

 

사곡동(沙谷洞)...원래는 모립실(謨立室)인데, 홍수가 나면 모래밭으로 변하므로 '모래실'이라 불러 사곡(모래 沙, 골 谷)이 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마을의 가에 새로이 형성된 갓골, 갓골은 새로이 생겼다고 새마라고도 한다. 마을 위에 있는 마을 이라는 뜻으로 운막골, 또 골짜기 안이라 하여 붙여진 공안 등이 있다.

 

형곡동(荊谷洞)...시무나무(가시나무 荊)가 많아서 불려진 이름. 사창(沙倉, 司倉)은 옛날 선주부가 선기동에 있을 때 창고를 관장하던 곳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락동(水落洞)은 물이 떨어지는 경관이 좋은 곳이란 연유에서 생긴 이름이다. 백정골은 백정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신기(新基)는 새로이 터를 잡아 형성된 마을이다. 댓샘(竹泉, 竹井)이 있었던 아랫마 등이 있었다. 세부지명으로 사창마을 중간에 울창한 숲이 있던 木谷, 안골, 성황당이 있던 덕곡, 울창한 송림이 있었던 새뫼 등이 있었다.

 

선기동(善基洞)...선주터라고도 하는데 옛날 선주부(善州府:고을 이름)가 있었던 곳. 덤바위(加岩)은 마을 뒷산의 층암절벽이 있어, 바위에 또 바위가 얹혀 있어 부른 이름이다. 이곳에는 호모골, 큰난치골, 작은 난치골 등의 골짜기가 있다. 덤미태는 덤바우 아래에 있다는 말이다. 삼거리는 구미시내, 아포, 부곡 등 세 갈래로 갈라지는 길목이다. 오롯골(梧洞)은 오동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 장승이 있었던 장흥(長興) 등이 있었다.

 

수점동(水店洞)...무수점이라고도 하는데 물과 관련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철(무쇠)이나 대장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소바탕[쇠바탱이, 牛場]은 소들이 풀을 뜯는 넓은 풀밭이 있는 곳이다. 금오산 내성마을에서 소를 키우거나, 빌려 쓸 때는 이 소바탕을 경유하여 소를 끌고 오르내렸다고 한다.

 

도량동(道良洞)...도량댕이[道村, 文章谷]이라고도 하였다. 야은 길재선생과 관련하여 도(도)를 가르쳐 널리 깨우친다는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산모퉁이에 있다는 모탱이, 소나무가 많이 있었다는 소롯골[소릿골], 밤실[栗里], 웃마을 밤실과 아랫마을 도량댕이 사이에 있던 중터[中基], 선주부 당시에 창고가 있어다는 곳터[庫基], 옛날에 감옥이 있다는 옥빼미[獄] 등이 있었다.

 

남통동(南通洞)...남쪽으로 금오산 자락의 도수곡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불려진 이름. 덕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덕뱅이[德坊], 아홉개의 골짜기가 있다는 아홉싸리[九谷山], 금오산성 내성안에 있던 성안마을, 대창골[大惠倉谷]은 금오산성 외성과 폭포 사이에 대혜창이 있었으므로 그곳에 있었던 마을의 이름이 되었다.

 

송정동(松亭洞)..옛날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에 정자가 있어서 불려진 이름. 옛날 속리원(俗離院)이 있던 속리, 마을 뒷산에 잣나무가 울창하여 백정산(栢亭山)이라고 하였고 이에서 연유된 백산(栢山), 백산에는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부뫼[푸뫼, 扶山] 또는 풍애(豊厓)는 마을 앞에 넓은 연못이 있어 풍덕지(豊德池)라 하였고 길조인 풍덕조(豊德鳥)가 살았다고 한다.

 

신부동(新浮洞)...낙동강가로 새로이 생긴 늪이란 뜻으로 신늪[新浮]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공단부지로 편입되어 지금은 없다. 신늪의 뒷산 넘어 기슭에 길게 늘어선 마을인 장동, 신늪에서 농지를 따라 옮겨 사면서 새로이 생긴 마을인 새뜸(新基), 신늪과 이웃하여 원래 칠곡군에 속했으나 공단조성때 편입되었던 낙계(落溪) 등이 있었다.

 

상모동(上毛洞)...원래는 사곡동과 한마을이어서 웟모래실[上謨]이었으나 일제시대에 글자가 바뀌었다고[謨-毛]한다. 모립곡(謨立谷) 혹은 모로곡(慕魯谷)이라 하였는데 모로곡은 폐위된 단종[노산군]을 사모한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밤나무가 많았던 밤마, 온돌용 구들돌로 쓰이는 평평한 돌이 많았던 석평[石平, 石片], 모로실(곡)에서 이거한 노곡(魯谷), 그외 세부지명으로 용이 내려와 놀았다는 용전(龍田), 망태같이 생긴 골짜기인 망태골, 절이 있었던 골짜기인 불당골, 늘 따뜻한 물이 흐르는 온수골 등이 있다.

 

임은동(林隱洞)...이무이라고도 하는데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으므로 숲속에 숨어 있는 곳이란 뜻. 웃마, 아랫마로 나위어져 있었다고 한다. 오양곡(오양곡)은 지형이 묘한 명당이며 허씨의 사랑채가 있어서 그 당호[집이름]를 따라서 부른 이름이라고 한다. 마을 위에 있는 골짜기는 웃곡이란 불렀다.

 

오태동(吳太洞)...연유를 알 수 없다. 다만 금오산과 관련된 지명으로 오산(烏山), 묘곡(妙谷), 구봉곡(龜峰谷;거북골) 등이 있다. 오산지하 불견오산(烏山之下 不見烏山) 낙강지변 불견낙수(落江之邊 不見落水), 즉 금오산 아래이되 금오산이 보이지 않고 낙동강변이나 낙동강이 보이지 않는 곳이 명기[명당]이라는 전설이 전해 온다고 한다.

 

신동(新洞)...새로운 골이라는 의미로 새월[혹은 새올;新谷]이라 한것이 유래라고 한다. 못뚝마는 못뚝 근처에 있는 마을이다. 새마을은 신곡에서 등 넘어 새로이 생긴 마을. 안마는 신곡의 안쪽에 있으며 천생산 줄기 산성곡(山城谷) 기슭에 있다. 웃마는 신곡의 위쪽인데 안마와 연결되어 있다. 거리마는 안마와 길게 연결되어 있으며 길가에 있는 마을이라는 말이다. 마을을 관통하는 맑은 시내와 우물의 물맛이 좋아 東泉이라고 한다.

 

구평동(九坪洞)...구진벌[구준벌, 귀전벌]이라고도 하는데 거북의 등 모양으로 딱딱하고 거친 땅이라는 설, 밭으로 돌아간다는 귀전부리(歸田夫里), 임란때 진을 9번 옮겨가며 싸운 곳이라는 구진벌(九陣伐) 등 여러 설이 있다. 불바우는 봉두암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데 봉두암산의 큰 바위가 벼락을 맞은 후 벼락 맞은 바위 즉 불바위[바우]로 불렸다고 한다. 무지개는 마을이 무지개 모양으로 생겼다고도 하고, 천생산 아래 약수터에 무지개가 생기면 이 마을까지 뻗친다는 말도 있다. 새뜸은 도토골에서 이거하여 새로이 생긴 마을, 도토골[도토리곡, 吐谷]은 경신년 산사태이후 이거하여 생긴 마을인데 주위에 돌이 많은데서 유래하였다. 그외 주막걸, 전염병으로 소가 죽은 곳이라는 소주건이, 전염병 가눙데서도 소들이 살았다는 사시골[산소골], 개바위, 큰바위가 있는 먹방산[왕바위] 등이 있다.

 

황상동(黃桑洞)...원래는 봉황(鳳凰)의 이마(?)를 뜻하는 황상(凰?)이었는데 일제시대에 황상(누를 黃, 뽕나무 桑)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인동팔경을 노래한 시에 봉두조하(鳳豆朝霞;봉두암의 아침 놀) 황상숙무(凰?宿霧:황상에 머문 안개)라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물고기가 숨어 있는 골짜기라는 어은곡(魚隱谷), 곽재우가 왜적을 물리친 곳이라는 검성곡(劍城谷), 검소하게 사는 곳이라는 검성곡(儉城谷), 금광이 있었다는 금성곡(金城谷) 등 여러 설이 있다.

 

인의동(仁義洞)..조선시대 인동부, 인동현의 중심지였다. 유학의 용어인 오상(五常) 즉 인의예지신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교동은 옥산[남산] 기슭에 자리한 마을로 향교가 있었기 대문이다. 중리는 안동장씨 중리파가 살아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남산은 옥산이라고도 하는데 인동장씨의 중심 터전이다. 인동장씨 남산파 종택이 있다. 임란때 마차가 집결한 곳으로 마차골이라고 한다.

 

진평동(眞坪洞)..옥토인 들이 펼쳐져 진평이라는 설,  신라의 진평왕이 사냥을 왔다가 머물렀기에 왕의 이름을 차용했다는 설이 있다. 양원(楊原)은 마을앞 시내가에 수양버들이 줄이어 있고 맑은 샘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조선조에는 매년 중춘(仲春)에 고을 원이 농사를 장려하기 위해 곡식의 씨앗을 나누어 주던 種子院이 있었다고 한다.

 

시미동(侍美洞)...시미골[시묘곡(侍墓谷);시묘살이를 한 골짜기]이 그 유래. 넘바위는 매일 바위를 넘나드는 곳이라고, 또 크고 넓은 바위가 많아서 넓바우라고도 전한다.

 

임수동(臨洙洞)...낙동강변에 자리한 마을(임할 臨, 강이름 洙)란 뜻. 소가 누워 있는 穴이라하여 우담동(牛譚洞)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갓등[邊登]은 나무터가 있었으며 변두리에 있다는 의미다. 반달밭[半月田]은 주위 산의 형세가 반달 같이 생긴 때문이라고 한다. 또 절이 있다는 절골, 제일 큰 골짜기인 큰골, 밤나무가 많았다는 밤낭골 등이 있었다.

 

양호동(陽湖洞)...유래가 확실치 않으나 볕 양(陽)자를 쓰는 양마(양말), 물가 빈(濱)자를 쓴 빈수골[濱水谷](湖)을 합쳐서 양호라 한 것이라 여겨진다. 비산나루와 마주한 양마나루가 있었다.

 

거의동(居依洞)...원래 거의곡(居義谷, 거리실)이라고 하여 의로운 사람들이 살던 곳이란 뜻인데 일제시대에 의지하여 사는[居依]이란 글자로 바뀌었다고 한다. 명동은 명동서당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용수골(龍水谷)은 예전에 마을앞에 소가 있어 용소 혹은 용지라고 하여 생긴 이름이며, 참깨실[진가곡, 眞佳谷]은 안동장씨 진가파가 사는데서 유래하였다. 구룡곡(九龍谷)은 아홉마리 용에서 비롯되었다.

 

옥계동(玉溪洞)...마을 앞에 흐르는 한천(漢川)의 물이 맑고, 조약돌이 구슬같이 아름다운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무이미[무리미, 文林]는 문사들이 숲을 이루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온수곡은 마을앞 웅덩이에서 겨울에도 김아나는 따뜻한 물이 나온다는데서 비롯되었다. 안사당[內祠堂]은 반월당 김종효의 사당이 있다.

 

구포동(구포동)...유래가 확실치 않으나 온천과 관련있는 溫造, 佳樂 혹은 佳村이라 부르는 취락이 있다. 온조는 온천수와 관련이 있는 듯 하다. 가락은 갈대가 무성하였다고 한다. 돌고개는 황상동에서 넘어오는 고개이다. 벼락골은 산위의 큰바위에 벼락이 떨어져 생긴 이름이다. 절골은 지금 천해사가 있는 골짜기이다. 필봉은 산의 봉우리가 붓끝같아서 생긴 이름이다.

 

금전동(금전동)...유래가 확실치 않으나 佳谷, 와래[臥川], 웃마, 새마 등 취락이 있다. 굿을 자주 하였다는 굿바위, 봉화로 교신하던 곳이라는 통신바위, 강건너 마을이라는 월갱이[越江], 약수터가 있는 약샘골, 범이 사는 굴이 있던 범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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